“世匣 묻는 포돌이”
김 용 수 / 시인
世匣을 피하라!
日匣을 채워라!
時匣을 풀어라!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조차 분별할 수 없다
시간타고 가는 구름도
시간몰고 가는 바람도
시간따라 가는 강물도
세갑 지닌 포돌이를 피하려한다
어느 날
하늘이 내려준 계급장 붙이고
걸어가다 주저앉고
달리다가 넘어지고
뛰어가다 멈춰서는 세갑 지닌 포돌이
쫒아오는 백발에 주춤대고
덮쳐오는 주름그물에 걸려든다
時匣을 풀고 똬리 튼 世匣의 땅
그곳에는
언제나 햇볕 찾아들어
하얀 배꽃을 피울 수 있는 梨陽 품목리
뒷산과 앞산 어우러짐이 범상치 않고
왼쪽과 오른쪽 날개가 도톰하게 흐르는
선비촌으로
心地 혈이 올곧게 뻗치고 솟아나
시간을 풀고
하루를 붙잡아
세월을 가둘 수 있는 곳
참삶의 보금자리다
내일은
世匣 피하려는 버팀목으로
日匣 채워지는 노을빛으로
時匣 풀어보는 전정가위로
뜨락 가꾸다가 땅 파서 흙 고르고
무더기로 핀 야생화 밭에서 세갑 묻는다
어김없이 쫓아오는 세갑을
12월 8일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은 까닭 모를 쓸쓸함과 서글픔이 뒤따른다. 구름 낀 하늘로부터 전해지는 우울함이 덧칠해 지는 날이다. 수많은 날 중에서 하필이면 오늘을 택했을까? 잡다한 생각을 하면서 거암 윤예주 시인의 탐방기를 쓰기위해 겨울나들이를 나섰다. 나는 게으름피우다가 들켜버린 어린애처럼 애꿎은 애마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순천시가지를 떠나 선암사. 낙안읍성. 율어. 복내를 거쳐 당도한 이양 땅, 그곳은 야트막한 동산들이 모여져 소꿉장난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높은 산들은 먼발치에 솟아 병풍처럼 둘러쳐져있고 철로와 도로가 밥상처럼 놓여있기 때문이다.
윤시인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이양면사무소 앞이다. 출발하면서부터 윤시인과 나는 전화통화로 보금자리에 대한 지리와 정보 등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인지, 그곳을 찾아가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으며, 낯이 설지 않았다. 꼭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오후2시 정각에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윤 시인이 보이지 않았다. 업무를 수행하다보니 조금 늦게 광주를 출발했나 싶다. 같이 간 친우와 나는 시골정취가 물신풍기는 이양다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시들은 인생 꽃, 한 송이가 썰렁한 실내의자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손님을 맞이하는 그녀와 그 옛날의 시간들을 더듬고 있노라니 추억은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순간, 글쟁이들의 삶이 그려졌다, 좋게 말하면 문학하는 사람들의 애환이 스쳐갔다. “돈도 안 되는 글을 써서 무엇을 하겠단 말인가? 참으로 답답하고 안쓰럽고 딱한 인생길이다. 글을 안 쓰고는 베길 수 없는 얄궂은 운명에 휩싸인 문학도가 되어버린 우리들이 아닌가?”
자문자답을 하고 있는 터에 다방 문이 열렸다. 윤 시인이다. 그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 나와 친우에게 목례를 하면서 “차는 마셨는지,”하고 말을 건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지난 이야기와 그 시절에 얽힌 노랫말들을 나열해 보았다.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최백호가 불렀던 ‘낭만에 대하여’란 노랫말 이었다.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생각나는 가사만을 읊조리다가 다방 문을 나섰다.
그렇다. 우리네 인생, 가버린 시간과 잃어버린 시간을 그리워하고 잊혀져가는 사람을 보고파하는 것이 기정사실인가 보다. 더구나 문학을 하는 문학도로써 감정과 감성에 젖은 그리움과 보고픔은 더욱더 진하게 베어나지 않을까 싶다.
잠시 후 우리는 윤 시인이 똬리를 틀었다는 이양면 품평리 보금자리에 도착했다. 듬직한 너럭바위를 조망으로 조성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군데군데 소나무가 식재돼 있고 금목서 은목서를 비롯한 동백. 철쭉. 모과나무. 광나무 등 수많은 정원수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80종이 넘는 야생화들이 정원석 사이사이에 심어져 있을 뿐 아니라 생울타리 주변으로 식재된 광나무와 야생화단지는 길손의 발목을 붙잡을 만 했다.
무엇보다도 집과 황토방을 지으려고 다듬어 놓았다는 그곳 위치는 좌청룡 우백호가 애워싸는 형국으로 주산과 배산의 어우러짐이 범상치 않았다. 내가 느끼는 대로 풍수지리에 맞아 떨어지는 혈맥이라면, 이제까지 쌓아 놓은 윤 시인의 德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윤 시인이 지금까지 살아온 발자취를 보면 이 같은 터가 스스로 찾아왔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는 광양시 진월면에서 태어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광양에서 보냈으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직업이 경찰관이었다. 그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업무에 종사하면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언제나 정도를 걸었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 소신을 가졌으며, 자신만의 철학관도 지녔다.
경찰관으로써 남을 위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의 시처럼 맑고 온화했다. 정이 물씬 풍기는 시어 속에는 경찰관이라는 이미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다 여성스럽기까지 하다. 어머니의 사랑에서부터 시작한 모든 사랑들이 작품으로 승화될 때에는 모성애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게다가 그의 삶은 자신이 쓴 시처럼 일치하고 있다. 경찰관이면서도 경찰관답지 않는 언행과 인간애는 크고 작은 德을 쌓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와 사람사귀기를 좋아했다. 그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시를 쓰게 된 동기도 그렇고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사귀어온 사람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의 행적은 유난히 빛났다. 현실적으로 크고 작은 단체의 장은 물론 정보과장을 비롯해 강남문학 회장직까지 맡고 있어 날마다 동분서주하다. 따라서 주위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한 편이다.
이뿐 아니다. 타고난 미인을 아내로 맞이한 그의 가정생활은 잉꼬부부라는 호평을 받고 있으며, 1남2녀의 아버지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일례로, 이번 순천 왔을 때, 동행한 아내와 외손자에게 대하는 언행들은 실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쳐졌었다.
윤 시인과 나와의 만남은 순천경찰서장실이었다. 정인균 전임서장과 우연한 이야기 끝에 경찰관시인 “윤예주”씨가 거론됐고 그의 시집을 보게 됐다. 나는 그의 시집을 보면서 그의 성품과 인격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역시, 윤 시인은 거짓이 없었다. 진솔함 속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시처럼 나를 맞이한 그의 언행도 똑 같았다.
그는 언젠가 ‘예술도 시도 자연과 사람을 떠나서는 생명력이 없다’며 ‘예술의 가치성과 문학의 가치관은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인생역경을 다뤄야 한다.’고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언제나 사람 내음을 풍기는 사람, 언제나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 언제나 자신을 낮추는 사람, 키 크고 속없는 사람이 아니고 늘씬하고 윤곽이 뚜렸한 미남인 사람,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윤예주 시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강남문학과 평사의 참살이 길에서 잊어서는 아니 될 거암이기에 화순군 이양면 품평리에 자리한 보금자리를 찾아 이 탐방기를 쓴다. 세갑을 채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