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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인생, 참살이 문턱에서

밤비 김용수 2009. 11. 18. 08:15

 

김 용 수 / 시인

 

지리산 등산길을 사람냄새 나는 정든 사람끼리 / 조잘대며 걷노라니 세월 이기지 못해서 쓰러진 / 썩은 구상나무 큰 덩치가 가는 길 가로 막는다 / 누워있는 원목 끝에 제멋대로 자리한 / 잔가지하나 분질러 짚은 지팡이 따라 / 더듬더듬 계절을 헤치며 / 풀밭 가로 피어 있는 야생화 만나서 정담을 나누고 / 저벅저벅 연륜을 그으며 / 돌밭 위로 솟아 오른 큰 바위 딛고서 정기도 받고 / 토박투박 흙길을 걸으며 / 황토 속에 끼어 있는 무생물 뽑아서 진기도 먹고 / 지리산 새소리로 재잘대다가 / 피아골 물소리로 노래하다가 / 직전 바람소리에 떨어진 새빨간 단풍잎 밟는다 / 어설픈 이야기를 정담으로 / 물오른 판소리를 득음으로 / 새로운 동화책을 한 문장으로 새긴 / 구상나무는 가지하나라도 내밀어 / 이기지 못한 세월을 또다시 거슬러서 / 하늘로 띄우다가 땅으로 묻다가 / 사람 냄새나는 사람들 지팡이로 / 참살이길 함께 가는 손발이 되고 있다. (구상나무 지팡이)

 

“어이! 자네나 나나 늦가을 인생이네. 쉬엄쉬엄 쉬면서 가세. 저기 저 능선 넘으면...” 지리산 등산객들의 대화 속에는 늙어가는 참살이 삶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들은 60대에 이르는 인생길을 사색하면서 지나온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사연을 피력하고 있었다. 특히 늙어가는 자신들의 건강을 지키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등산에 낙을 삼은 것 같았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 고독함과 외로움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그 고독함과 외로움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더 늘어만 가고 얇은 가슴팍을 후벼 파지 않을까 싶다. 하루를 소일하는데 어떻게 보내야 할까?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까? 등 갖가지의 생각이 교차하다가 마침내 결정한 것은 고독함과 외로움달래기다.

그렇다. 늦가을에 접어든 인생길에서 사람 내음 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시간을 소일할 줄 아는 중년길, 참살이 길을 만들어야 가야한다.

어쩌면 우리 인생길에서 제일 아름다운 삶은 사람을 사귀는 일일 것이다. 더욱이 훌륭한 업적을 남기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도 사람을 사귀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즉, 고독함과 외로움 속에서 작품을 Tm고 살아간다는 詩人들의 삶속에서도 사람을 사귀려는 행적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요즘 주막이 그립다. / 첫머리재, 한티재, 솔티재 혹은 보나루 / 그 어딘가에 있었던 주막이 그립다. / 뒤란 구석진 곳에 소주고리 엎어놓고 / 장작불로 짜낸 홧홧한 안동소주 / 미추룸한 호리병에 묵 한 사발 / 소반 받쳐들고 나오는 주모가 그립다. / 팔도 장돌뱅이와 어울려 투전판도 기웃거리다가 / 심심해지면 동네 청상과 보리밭으로 들어가 / 기약도 없는 긴 이별을 나누고 싶다./ 까무룩 안동소주에 취한 두어 시간 잠에서 깨어나 / 머리 한 번 흔들고 짚세기 고쳐 매고 / 길 떠나는 등짐장수를 따라 나서고 싶다. / 컹컹 짖어 개목다리 건너 / 말 몰았다 마뜰 지나 한 되 두 되 선어대 / 어덕어덕 대추벼리 해 돋았다 불거리 / 들락날락 내 앞을 돌아 침 뱉었다 가래재... / 등짐장수의 노래가 멎는 주막에 들러/안동소주 한 두루미에 한 사흘쯤 취해 / 돌아갈 길 까마득히 잊고 마는 / 나는 요즘 그런 주막이 그립다.(안동소주 안상학)」

 

권정생 선생은 생전에 안상학의 시를 "사람은 고독할 때만이 자신과 이웃에 대해 진실할 수 있다. 안 시인의 시에는 유난히 외로움이 가슴 아프도록 깔려 있다. 외로움을 아는 인간은 그 외로움에 대한 소중함도 안다. 고독을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시를 쓰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라며 그를 고독함과 외로움을 함께한 진실한 시인이라고 평했지만 그도 사람 내음 나는 사람을 사귀려 노력했었다고 한다.

어쨌든 외로움과 고독함을 즐긴다는 詩人들도, 늦가을에 접어든 중년인생도 외롭고 고독한 것은 싫으며, 견디기 힘든 것이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도 천년을 산다는 구상나무 지팡이 짚고서 사람 내음 나는 사람들끼리 참살이 길을 쉬엄쉬엄 쉬어감이 어쩔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