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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강의실 / 김용수

밤비 김용수 2015. 6. 9. 16:01

 

어둠이 내리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캠퍼스는 적막하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면서 고함을 지르던 학생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대화를 나누던 학생들도 모두 떠났다. 간간히 비쳐드는 건 오가는 자동차불빛과 밤의 강의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뿐이다.

 

밤의 캠퍼스는 야간학생들을 기다리는지, 몇몇 강의실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썰렁하게만 느껴졌던 밤의 강의실, 그리고 야간학생들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번진다.

 

그들은 20대에서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과 각양각색의 취향을 지녔다. 그들에게 있어 밤의 강의실은 푸른 꿈이 아닐 수 없다. 뒤 늦은 향학열에 불타고 있는 가슴속에는 파란 꿈의 씨를 싹틔우고 있다. 더욱이 그들은 야간에 수업을 받아야 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의 불굴의 투지가 빛나고 있다. 그래서 일까? 야간학생들의 마음가짐과 그 꿈은 더욱 더 푸르게 피어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촌음도 금싸라기 같은 시간이고 단돈 백 원이라도 귀중한 자산으로 여기며 날마다 밤의 강의실을 찾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들 중에는 가난을 곱씹는 학생도 시간을 곱씹는 학생도 아니 가치관을 형성하는 학생들도 있다. 아니 만학도의 아픔과 눈물을 다독이며 切齒腐心하는 야간학생도 있을 것이다.

 

밤이 익어갈수록 수업에 몰두하고 있는 야간학생들의 집념은 강하다. 종일토록 일터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과 함께 출석해 공부에 임한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있어 잠이 쏟아지면서 강의내용이 귀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눈을 부릅뜨고 자세를 똑바로 세운다. 또 심호흡을 한다. 그래도 눈까풀은 감기고 바른 자세를 지탱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어쩌랴! 그래도 참고 배워서 학점을 따고 졸업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이를 악물고 마른침을 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교수들은 제자들의 건의사항을 뭉개버리기 일쑤고, 자신들의 권위의식만을 내세운다. 교육철학은 뒷전이고 자신의 권위와 영달에만 연연한다. 특히 자신의 영달을 꾀한 나머지 제자를 갑을관계로 여기며 동료교수간의 불협화음까지 조장한다.

 

그런 연유에서 한 만학도의 짜증스럽고 푸념 섞인 말을 인용해볼까 한다. 그녀는 쉰 나이를 뒤로한 채 야간대학에 입학해서 올해 2학년이다. 만학의 아픔과 눈물을 가슴깊이 묻어두고 날마다 밤의 강의실에 출석, 젊은 날의 못다 배운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과 함께 밤의 강의실을 찾는 모범생이다.

그녀는 밤의 강의실에 출석하는 즐거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며,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벌어 가난한 가정사를 책임져야 했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그녀에겐 오늘의 만학이 얼마나 값진 삶이며 기쁨인지, 마냥 즐거울 뿐이다.

 

더욱이 그녀는 결혼해서도 남편과 자식들의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고 쉰 나이가 넘어서야 시간을 내어 자신이 바라고 바랐던 대학캠퍼스를 밟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쳐진 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캠퍼스생활이 아니었다고 한다. 푸른 꿈과 희망의 나래를 한없이 펼치게끔 가르치고 지도해 주는 교수 상에서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제자사랑은 오간데 없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갑을관계의 교수 상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한자어로 敎授는 가르침 교와 줄 수를 쓰고 있다. 상아탑의 근간인 가르침을 주고 일상생활의
일깨움을 주어야 하는 교수 상이 뒤틀려 있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 사이는 사랑은 물론이고 인성과 인본을 고리로 엮는 통로가 아닐까 싶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한 이론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밑거름이 되는 사람냄새 나는 실기를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잠시 필자의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젊은 날의 필자의 캠퍼스생활은 많은 것을 일깨우게 했다. 그중에서도 ‘野井이라는 호를 지닌 들샘 교수님의 일 거수 일 투족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참 스승 상이었다.

 

그는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희생을 아끼지 안했다. 학교수업보다는 호연지기의 수업방법을 택했다. 즉, 실내강의보다는 실외강의로 캠퍼스 내에 있는 수목들의 학명과 이름 등을 낱낱이 알려주면서 인성을 가르쳤고 정의로운 삶, 도덕적인 생활방식을 일깨웠었다.

 

특히 그는 사고뭉치의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공직생활까지도 접으려 했다. 제자들의 잘못은 곧 자신의 부덕과 가르침이 부족한 소치라며, 제자들을 위한 사죄를 본인 스스로가 책임졌던 사례까지 남겼었다.

 

이뿐 아니다. 그는 전염병(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는 제자 집을 방문해 기도와 함께 빠른 쾌유를 빌었으며, 같은 과 학우들에게도 그 친우 집에를 찾아가기를 종용했고 격려와 함께 용기를 북돋아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어쩌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젊은 날의 캠퍼스생활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면서 파랗게 푸르게 펼쳐지고 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서 썼던 필자의 ‘들샘 은사님’을 게재해 본다.
 
완도 땅 깊은 곳에서
속으로 속으로만 흘러
향림골에 솟구친 물줄기 하나!

순천대학 교정에
들 샘으로 터 잡고
고이지 않도록
탁하지 않도록
생수 교훈 가르친
野井 은사님!

쉼 없이 솟아나고
끝없이 흘러가는
들 샘의 흔적마다
이끼 낀 들돌, 디딤돌 되고
푸른 뜰 수목, 생기 뿜어내는
참살이 사랑 베풀고 있답니다.

마르지 않고
마를 수 없는 野井 은사님!

당신 흥에 겨워, 막걸리 한 사발에
“돈 도라지”부르며 어깨 춤 “더덩실”추던
그 때가 언제이던가요?
“돈 도라지” 꿈 피워 향림골에 바친

들 샘 은사님!
숲 속의 산 짐승도
커 가는 나무들도
베푸는 사랑, 野井 사랑에 빠지고 있답니다.

 

아무튼 종일토록 일터에서 일을 마치고 밤의 강의실을 찾는 야간학생들의 발길이 무겁다. 초생 달 기웃거리고 뭇별이 속삭이는 밤의 캠퍼스에서 참 스승 상을 그려본다. 교수와 제자 사이를 갑을관계로 여기고 권위의식만을 내세우는 교수 상은 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