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별 집

중국 강남 탐방기

밤비 김용수 2005. 9. 22. 14:35
 

  김용수 시인 중국을 가다  2 소주              


  민족의 아픔과 통한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상해 임시정부를 빠져나온 필자와 순천 교육청 산하 유공교사 일행은 각각의 버스에 옮겨 타고  홍구 공원으로 향했다. 임시정부에서 홍구 공원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아 20 여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지 가이드가 설명한 홍구 공원과 윤봉길 의사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또 다른 역사관을 심어 주었고 민족의 자긍심을 갖게 했다. 그가 말한 윤봉길 의사는 중국역사 속에서도 길이 빛나고 있었다.

  왜냐하면 1942년 4월 29일 그 날! 홍구 공원에서의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투척사건은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에게 있어 복수심을 불러 일으킨 반면 일제국주의 에게는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이 날은 일제국주의자들이 중국 상해를 점령한 후 천황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뜻에서 ‘승리의 열병전례식’을 거행하는 자리였다. 따라서 이 자리를 빛내기 위해 일본의 문무고관들이 대거 참석,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윤 의사는 일제국주의자들의 7개월에 걸친 혹독한 고문과 육체적 정신적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한 한국인으로서의 기개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살인. 강도 일본 제국주의자와 군벌 재벌을 향한 큰 경고였으며, 침략자에 대한 경고이자,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궤멸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또 우리민족에게는 지난 세월 일제의 침탈로 멍든 육신의 한국인이 노예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만천하에 고한 사건이기도 했다.

  우리일행은 홍구 공원 왼편에 자리한 매정이란 정자 주변을 배회했다. 하지만 그 날에 윤의사의 투혼은 찾아볼 흔적이 없고 그 주위에 ‘윤봉길 의거 현장’ 이라고 새겨진 비석만이 홀로 서 있었다.

  순간 필자의 뇌리를 스치는 한편의 詩가 떠올랐다. 그 詩는 매헌 윤봉길(1908~32) 의사가 중국 훙커우(虹口) 공원 의거 직전인 1931년 가을 일본의 침략 아래 놓인 한·중 양국의 암담한 현실을 읊은 한시(漢詩)였다.

  ‘상해인민혁명사화책(上海人民革命史畵冊)’에 등장하는 이 詩는 칠 언 절 구 로 “일찍이 암담한 조국의 달빛 아래 술에 흠뻑 취해 피를 토하고, 지금 먹구름 싸인 상하이의 가을 아래 슬픈 노래 부르며 울분을 토한다(淋?i 痛飮漢城月, 慷慨??市秋)”라는 내용이다.

  필자는 이곳 벤치에서 앉아 그 날의 잔영을 그려 보았다.

  푸라타나스 찢긴 이파리 / 쪽 배로 떠다니는 / 홍구 공원 연못위엔 / 잔물결 일렁이고 / 프랑스인이 심었다는 / 푸라타나스 얼룩무늬목은 / 옛 정취 풍기며 / 잊지 못할 울분만 / 그 날의 윤 의사 혼을 / 쪽배에 싣고 있었다.

  1시간에 걸친 홍구 공원의 탐방을 마친 일행은 황포강의 야경과 뱃놀이를 즐기기 위해 황포강변 음식점으로 향했다.

  오후 6시 30분, 저녁식사를 끝낸 일행은 황포 강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상해의 기적을 이뤘다는 황포 강을 뱃놀이를 즐겼다. 도도하게 흐르는 황포 강은 중국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산업의 동맥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강변으로 즐비하게 버티고 선 빌딩 숲에서 비춰대는 불빛은 형형색색으로 불야성을 이루었고, 강 위를 떠다니는 유람선과 여러 종류의 배들의 불빛들이 서로서로가 어우러져 거대한 수중도시를 연상케 했다. 특히나 하늘에 떠있는 달과 별이 황포 강에 떠서 새초롬  하게 빛나는 광경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야경이었다.

  현지 가이드는 말했다. “황포 강 주변 빌딩에서 불을 밝히고 있는 전기료는 중국 상해의 관광객을 위해 사용되므로 중국정부가 부담 한다”고”했다.

  밤 8시, 황포 강 뱃놀이를 유쾌하게 마친 일행은 내일의 탐방을 위해 소주의 숙박지로 향했다. 상해에서 소주까지의 거리는 버스로 약 2시간이 소요 됐다. 버스 안에서 바라다본 상해. 소주의 고속도로변 밤 풍경은 어둠으로 인해 자세히 감상할 수 는 없었다. 


        

  (사진 설명) 홍구 공원 입구 왼편에 세워진 매정(梅亭 : 메이팅)이란 이름의 정자가 세워져 있고 그 주위에 '윤 봉길 의거현장'이라고 새겨진 비석만이 홀로 서 있다.

  

   

  (사진 설명) 홍구 공원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여러 가지 운동을 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남자 노인들이 많다는 점과 집에서 입는 평상복으로 주위 사람들의 시선 같은 것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춤과 운동을 즐기고 있다.


  다음날 아침 8시, 유공교사 일행은 동양의 베니스라 일컫는 소주의 탐방 길에 올랐다. 도농 복합도시인 이곳은 농촌지역에 근접한 문인촌의 집들은 문인들의 고장처럼 의미 있게 지어져 있었다. 집의 벽은 백지를 상징하는 하얀색으로 칠했고 지붕은 먹물을 상징하는 검은색으로 칠해 보는 이로 하여금 문인을 연상케 했다.  

 “上有天堂, 下有蘇杭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주와 항주는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양자강 삼각주 평원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양의 베니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유명한 물의 도시이다. 그리고 정원과 물로 대변되는 중국남방의 대표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소주는 “사주지부(絲綢之府 : 비단의 도시)”, “어미지향(魚米之鄕 : 바다가 가까워 살기 좋은 곳)”, “원림지도(園林之都 :정원의 도시)” 등으로 칭해졌다. 송 대에 이르러서 번성해, 비단 생산이 남겨져 있고, 소주의 자랑인 정원도 이때부터 많이 만들어 지게 됐다. 지리적 장점과 견직물 산업을 활성화시켜 부유한 상업 도시로서 그 명목을 계속 유지해 왔다.

  또,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소주의 정원도 유명해졌다. 소주의 정원은 정교함이 특징으로 중국남방 고전원림건축예술의 정화라 할 수 있다. 송 대부터 이어진 정원은 200가구에 이르렀고, 지금은 10군데 정도가 복원되어 외부에 개방되고 있다. 그 중 송 대의 창랑정(滄浪亭), 원대의 사자림(獅子林), 명대의 졸정원(拙政園)과 유원(留園)이 가장 대표적인 강남의 원림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무엇보다도 소주는 수양제가 만들어놓은 수로(1790키로 미터)가 발달돼 도심까지 운하로 이어져 있고, 가는 곳마다 물의 예술이 극치를 부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4대정원의 하나인 졸정원은 물밑에서 풍화한 망가석을 조경석으로 사용해 부를 상징케 했으며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길 수 있도록 잘 조성돼 있었다.

  특히 이곳 연못가의 유청각은 중국의 이상은 시인이 연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쓴 시가 정 중앙에 걸려 있어 오가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필자가 이곳을 지날 때도 작은 빗방울이 쏟아져 연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픈 시상이 떠올랐다.


졸정원 연못위로

너울대는 연잎은

울 엄마

가슴을 덮고


탐스런 홍연송이는

울 엄마

두 손 모아 피워 올린

사랑 꽃이다.


유청각서 모인

제비 남매는 연잎에 구르는

옥 같은 물방울 보며

연 잎에 떨 구는

빗소리 담는다.


울 엄마

마음 덮는 연잎을

울 엄마

두 손 비는 연꽃을


부질없는 잉어 떼만 부딪는다.


  김용수 시인 중국을 가다 3 항주

11시 30분, 순천 교육청 산하 유공교사 일행은 오자서와 서시가 노닐었던 항주에 도착했다. 항주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절강성의 수도로 그 경치가 빼어났다.

  항주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서 호를 꼽을 수 있다. 서 호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둘레 15km가량의 거대한 호수로 중국 최고의 미인 ‘서시’의 이름에서 따와 서 호라고 불린다. 서 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가 뜨나 사시사철 특유의 독특한 운치를 자아낸다. 특히 안개 낀 새벽이나 달 밝은 밤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또 서 호 서쪽 북고봉과 비래봉 사이에는 중국 10대 사찰중의 하나인 영은사가 위치해 있다. 중국 동진 시대에 건립되었고 명나라 초기에 재건되면서 영은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영은사의 대표적인 유물로 거대한 대웅전과 금도금한 불상을 꼽을 수 있다.

  게다가 이곳의 거지 닭은 일미로 불리 울 만큼 유명하다. 통닭에 황토를 발라 굽는 거지 닭은 말 그대로 거지가 먹던 닭이라 거지 닭이라 불린다.

  심복들과 함께 암행 중이었던 청나라 건륭황제는 밤이 깊도록 잠자리를 찾지 못해 노숙을 하게 되었고 출출했던 황제 일행이 거지들이 숨겨 놓은 닭고기를 야식으로 맛있게 먹은 이후 궁중음식이 되어 황토 닭 혹은 거지 닭으로 오늘날까지 전래 되었다고 한다.

  항주의 또 하나의 볼거리로 육화탑을 꼽을 수 있다. 매년 음력 8월 18일을 전후로 바닷물의 역류가 이뤄지는데 육화탑은 높은 물결을 가라앉히고 역류를 막아달라는 기원으로 세워진 탑이다. 현재 중국의 국보로 정해져 있어 보수와 유지에 힘쓰다 보니 옛 자취가 정갈하게 남아있는 듯 했다.

  그날 밤이었다. 유공교사 일행은 송나라 성안의 물싸움행사와 송궁 연무의 공연을 보기위해 송성을 갔다. 그곳에는

말 그대로 송나라 시대의 성을 보전해 두었으며, 돌조각은 현대에 만들어 진 것 같았다.

  성 안 공연장에는 양정의 빛과 송궁 연무'로 송나라의 건국과 황제의 즉위식에 대한 내용을 제1부로 공연했다. 제2부는 '금과철마'로 남송시대의 명장 악비 장군의 충성과 용맹에 관한 내용이며 제3부는 '아름다운 서 호와 전설'로 중국의 전설적인 사랑이야기를 다뤘고 제4부는 '지구촌의 모임' 로 중국의 미래에 관한 희망을 표현했다.

  다음날 아침 8시, 유공교사 일행은 영은사로 향했다. 그곳은 동진(東晉) 함화 원년인 서기 326년 인도의 승려 혜리 스님이 항주에 왔다가 비래봉(飛來峰)의 산세가 매우 신비롭고 인도의 영취산과 비슷한지라 여기에 터를 닦고 지은 절이다. 신선의 혼이 깃들만한 수려한 곳이란 뜻의 ‘선령소은(仙灵所隱)’이란 말에서 영은사라는 절이름이 유래한다. 소림사보다 180년이 앞선 건축이다.절 입구에서 천왕문까지 계곡을 낀 숲길을 걸어 오르는데 왼쪽 바위벽에 10세기에서 14세시까지 새긴 338위의 마애불이 볼만하다. 군데군데 석굴도 있으며 감실 속의 큰 달마상도 인상적이었다.

  이후, 유공교사 일행은 중국이 자랑하고 강남의 산업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실크공장과 민물진주 양식장. 녹차 재배지를 중점적으로 탐방했다. 맨 먼저 간곳은 실크공장이었다. 이곳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과정과 제품을 만드는 시설 등 상품이 진열돼 있었다. 다음으로 찾는 곳은 진주 양식장과 녹차 재배지였는데 그들의 산업사회를 의심케 했다.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자본주의 국가보다도 더욱 자유스런 유통과정 등이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또 노.  사간의 반목과 갈등 같은 것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들이 생산한 각종 상품들은 가격이 쌀뿐 아니라 주로 인력으로 만든 수공예 품들이어서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런 면에서 중국과 우리나라를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산업은 큰 걱정거리로 다가서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자면 드넓은 땅과. 엄청난 노동력. 그들의 정신력. 등은 무한한 잠재력으로 세계의 산업을 위협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번 순천 교육청 산하 유공교사 강남(상해. 소주. 항주)탐방은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했으며 학생들의 가르침에도 큰 보탬이 됐을 것이다. 




* 사진은 골라서 하세요.    



화려한 모습의 유람선

   

중국의 4대 미녀

서호의 주인공인 서시부터, 왕소군,초선,양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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