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수 칼럼 집

잔인한 4월 그 끝자락에서 / 김용수

밤비 김용수 2016. 4. 26. 10:18


 

잔인한 4월이 가고 있다. 수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새들이 지저귀는 4월의 끝자락에서 또 다른 생각들이 밀려온다. 새봄을 맞이하는 기쁨보다도 잔인한 4월의 상처를 다독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세월호 침몰로 인한 자식 잃은 부모를 비롯해 유가족들의 비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 상기되고 있을 것이다. 아니 그날에 악몽은 온 국민의 상처였고 인류의 잔인함이었다.

 

지금도 다수의 사람들은 단원고 학생들을 생각한 나머지 4월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도 앞바다에 침몰된 세월호 속에서 죽어가는 학생들을 결코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차갑고 짠 깊은 바닷물 속, 세월호에 갇혀서 죽어가는 그들의 참상을 생각하노라면 자신들도 그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피가 범벅이 되도록, 손톱이 다 닳도록, 세월호 문짝과 벽면을 긁었다는 흔적들을 생각할 때, 그 참혹함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을 것으로 상상된다. 아마도 피가 거꾸로 솟고 호흡이 멈춰졌을 것이다. 생때같은 청순한 학생들을 수장시킨 4.16 세월호의 진상은 두 해가 지나도록 밝혀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야속하다.

 

청순하고 발랄한 학생들을 앗아간 세월호 사건을 뒤로하고 4월의 잔인함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제주 4.3 의 원혼은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잠들지 못하고 있고, 4.19 56주기를 맞이한 우리 정치는 구태를 벗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기본적인 인권의식마저 잃어버린 위정자들의 틈바구니에서 국가와 국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4월의 잔인함이 아닐까 싶다. 56년 전 4월로 되돌아가 보면 지금 우리가 무얼 하고 있는지 한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4,13 총선에서 패배한 위정자들의 한숨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지난주였다. 일부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인식한 듯 공공장소에 나오기를 꺼려하면서 지난 4,13 총선을 원망했다. 그들은 각종 언론매체들의 출구조사결과를 부인하려했고 패배의 원인조차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쟁터와 같은 정치판으로 오직 승자만이 존재하기에 패자에게는 철저한 짓밟힘과 뼈저린 아픔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일부위정자들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말의 무게를 실감했다고 한다. 특히 여당 국회의원 후보들에게 있어 2016413일은 가장 잔인한 날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들 어느 누구도 여당이 총선에서 참패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자. 이번 총선결과는 초등학생들까지도 회자됐었다한다. 아이들끼리 만나서 한 첫 인사가 선거결과에 관한 것으로 각 당의 국회의원 당선자 숫자까지 밝히며 제법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초등학생들의 입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도는 것은 너무도 낯설고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이면서도 당혹감을 느낀다는 것은 뭔가 어색하고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그 현실 역시, 잔인한 4월로 비쳐질 수밖에 수 없다.

 

어쩌면 4월은 생명의 달이면서도 잔인한 달로 인식되어진지 오래다. 4월의 끝자락에서 필자는 노래한다.

 

꽃들이 앞 다퉈 핀다고 봄은 아니다

잔인한 4월은 가라

멀리멀리 저 멀리로

 

피는 꽃에 맺힌 이슬보다도

지는 꽃에 달린 속물이 서럽다

 

노란 퓨리쟈 꽃향 가시기 전에

핏빛 산다화 가지 꺾이기 전에

잔인한 4월은 오고야 말았다

 

붉게 핀 베고니아 꽃잎 흩날리는

4월에는 긴 한숨을 몰아 쉰다

 

불규칙한 맥박이 뛰고

피가 거꾸로 솟는 4월에는

진도 팽목 항이 울렁이고

앞바다 물빛이 시푸르다

 

잔인한 4월에는

갓 머금은 노란 꽃송이들이

바다 속에 던져지고

갓 피어난 붉은 꽃송이들이

땅바닥에 버려지고

정이든 흙꽃송이가 눈에 밟인다

(필자의 잔인한 4월에는 전문)